리시드(Reseed) - 서막
리시드 (Reseed)

일러두기
이 작품은 허구의 창작물로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이름, 인물, 사건은 작가가 상상한 허구적인 것입니다. 사건, 장소, 인물의 유사점이 있다면 이는 전부 우연의 일치입니다.
- 서막 -
차윤은 강의실 한복판에 앉아 있었다.
전면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맑은 햇살. 회색빛 칠판. 사각사각 연필 소리. 타닥타닥 노트북 타이핑 소리. 모든 것이 멀게 느껴졌다. 시멘트 벽도, 메마른 듯한 학생들도, 허공을 울리는 교수의 목소리도. 그냥, 배경 그 자체인 듯 했고, 자신이 화면 안 어딘가에 조용히 끼워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피곤한 거겠지.'
차윤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요즘 부쩍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몸은 여기 있는데, 정신은 어딘가 한발짝 비켜서 있는 느낌. 강단 위, 교수는 낮고 메마른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태양은, 노화하고 있습니다."
단어들은 공기 속을 부유했다. 가벼운 종이조각처럼.
"중심부의 수소 연료가 거의 소진되면, 에너지는 급격히 불안정해질 수 있습니다."
차윤은 턱을 괴고 창밖을 봤다.
하늘은 맑았다. 깨끗하게 비워진 캔버스 같았다.
'저 하늘도, 누가 칠해놓은 거 아닐까.'
뜬금없는 생각이 스쳐갔다.
하지만 곧 스스로 웃어넘겼다. 천문우주를 공부하는 자신이 할 말은 아니었다.
"태양의 죽음은, 단지 시작일 뿐입니다."
교수는 칠판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나갔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우리 인류는 골디락스 존(Goldilocks Zone)에 위치한 다른 항성계로 이주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도 있습니다."
교수의 말은 메아리 처럼 강의실을 멤돌았다.
그러나 차윤의 머리는 이미 딴 데 있었다.
'졸리다.
어제 게임만 안 했으면 좋았을걸. 아니야, 스트레스 풀려면 게임도 해야지. 그럼 과제는? ……아, 몰라.'
머릿속은 산만했다.
그때, 옆자리에서 팔꿈치로 툭-
길우였다.
"야, 윤아."
목소리가 쓸데없이 진지했다.
"이 수업 꼭 잘 들어야 된다. 수요일 아침에 수업 잘 안 들으면 이번 학기 니 운세는 존망임."
차윤은 돌아봤다.
길우는 마치 세계의 비밀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운세요?"
차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ㅇㅇ. 나 작년에 수요일 아침 이 강의 건성건성 들다 그 학기 조졌어. 과제 폭탄에, 팀플 조원 지옥 랜덤 뽑기 당첨, 지갑 잃어버리고, 애인한테도 차임 당하고, 머리 다 빠지고… 너 진짜 나처럼 되고 싶냐?"
길우는 한 손으로 머리숱을 들어올리며 가리켰다.
모르긴 해도, 대머리 기운은 아직 전혀 없어 보였다.
차윤은 겨우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 형은 진짜다! 진지하게 헛소리하는 재능이 있다!'
그래도, 이상하게-
길우의 이런 말들은 가끔 마음에 걸렸다. 뭐랄까. 말도 안 되는 얘기인데, 묘하게 현실감과 믿음이 있다. 길우는 다시 속삭였다.
"형 말 들어라. 믿거나 말거나지만, 믿는 놈만 살아남더라."
차윤은 코웃음을 치며 다시 턱을 괴었다.
그 순간, 아주 짧게-
기시감이 스쳤다.
이 자리.
이 대화.
이 공기.
'봤던 것 같다.'
차윤은 무심코 목덜미를 만졌다.
가볍게 쓸어내리는 손끝에, 알 수 없는 서늘함이 맺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강의가 끝나갈 무렵, 교수는 말을 멈추고 칠판에 몇 가지 참고 문헌을 적었다. 학생들은 의자에 달린 가방을 뒤적이거나, 노트북을 덮거나,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저, 또 하나의 수업 풍경.
차윤은 조용히 가방을 둘러메며 생각했다.
'아무 일도 없는 게, 어쩌면 가장 이상한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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